CBS Radio 음악FM 93.9MHz 매일 18:00~20:00 어렸을 때 어머니랑 자매처럼 친하게 지내는 이웃집 아주머니가 계셨습니다. 남편과 일찍 사별한 후 3남매를 데리고 열심히 사는 아주머니를 어머니는 많이 도와주고 싶어 하셨습니다. 장사가 늦게 끝나기라도 하면 그 집 아이들이 우리 집에서 저녁을 먹고 시간을 보내다 가도록 했습니다. 저도 아주머니 댁 아이들을 막내 동생처럼 귀여워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아주머니 댁 아들이 사춘기가 오면서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학교도 자주 결석하면서 엄마 속을 섞였습니다. 어느 날 외출했다 집으로 가는 길에 아주머니 아들과 마주치게 되었고 오늘은 형이랑 놀자고 해서 둘이서 영화를 보고 저녁도 먹으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다음에도 형이랑 놀지 않겠냐고 연락처를 받았고 그 후 시간이 날 때면 연락을 해서 만났습니다. 그렇게 몇 년을 만나게 되면서 아주머니 댁 아들이 제게 마음을 열어 보였고 저도 그럴 때마다 귀담아 들어주고 ...
Jun 15, 2023•3 min
CBS Radio 음악FM 93.9MHz 매일 18:00~20:00 지난 사랑은 비디오나 카세트처럼 미세한 모터 소리를 낸다. 지루할 때는 앞이나 뒤로 재빠르게 넘긴다. 우리는 테이프를 꺼내 녹화를 뜬다. 우리의 과거는 십 쎈티만큼의 미래에 둥글게 말리고 있다. 그러니까 어느 골목에서 갑자기 과거의 사랑이 재생되더라도 놀라면 안 된다. 우리는 그저 먹먹해지면 되니까. 과거와 미래는 뒤바뀐 기억이다. 지금 사랑하면서 우리가 예전에 지나온 어느 골목을 떠올리는 건 죄다. 우리는 한 곡만 반복해서 들었고, 한 장면만 반복해서 보았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언제나 열대야처럼 늘어진다. 사랑이 저기 있는데, 리모컨을 쥐고 소파에 누워서 우리가 겨우 할 수 있는 건, 꾸벅꾸벅 조는 일뿐이다. 목소리는 변하고 얼굴은 일그러진다. 필름을 뽑아내기까지, 우리는 적당히 늙어간다. 백상웅 시인의 <오래된 테이프> 예전엔 좋아하는 음악이나 영화를 테이프가 늘어지게 보고 또 보았었지요. 지나고 ...
Jun 15, 2023•3 min
CBS Radio 음악FM 93.9MHz 매일 18:00~20:00 작은 흙집 신발장 앞에 채송화를 심었습니다. 채송화 꽃이 피자 도시에서 찾아오는 손님들 먼저 그 앞에 머리를 숙입니다. -채송화, 오랜만에 본다야. -우찌 이리도 이쁘게 피었노. -앉아서 보니께 더 이쁘네. 채송화 꽃잎 같은 사람들이 채송화 꽃잎 앞에서 가만히 머리를 숙입니다. 서정홍 시인의 <따뜻한 예의> 머리 숙여 작은 꽃을 보듯 이웃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싶습니다. 아이와 눈을 맞추며 대화할 줄 알고 약자에게 절대 함부로 하지 않으며 아무리 힘들어도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 언제나 따스한 예의를 갖춘 그런 사람 말예요. See omnystudio.com/listener for privacy information....
Jun 14, 2023•2 min
CBS Radio 음악FM 93.9MHz 매일 18:00~20:00 저는 지금 회사에 경리로 입사해 사장님 비서직을 맡고 있습니다. 사실 비서들의 주된 업무 중 하나는 골프 부킹이지요. 사장님에게서 '몇 월 며칠 몇 시 몇 명 골프장예약' 이렇게 지시를 내리면 그때가 주중이던 휴일이던 무조건 부킹을 완료해서 내역을 사장님께 보내드려야 합니다. 근데 가장 중요한 건 사장님의 일정이 변경되면 그것도 제때 예약을 변경하고 제때 취소를 해야 한다는 겁니다. 조금의 오차도 실수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죠. 근데 며칠 전 사장님이 예약하신 날짜에 일정이 생겼다고 취소해달라는 지시를 받았는데 그걸 제가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결국 취소를 못했고 발을 동동 그르며 골프장에 부랴부랴 연락을 했죠. 그랬더니 골프장 측에서는 날짜가 임박 해 취소가 안 된다며 위약금 을 내라고 합니다. 안 그래도 작은 아이가 지난달부터 학원을 한 개 더 다니고 싶다고 해서 돈이 더들어가야 할 판인데 아이한테도 미안...
Jun 14, 2023•3 min
CBS Radio 음악FM 93.9MHz 매일 18:00~20:00 저와 여자 친구는 재수학원에서 만났습니다. 저와 방향도 같아 매일 같이 걸었습니다. 근데 여자 친구는 비가와도 그냥 내리는 비를 맞고 걸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뛰어가 우산을 씌어주곤 했죠. 비가 오는 날이면 항상 그녀를 학원 앞에서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한번, 두 번 우산을 같이 쓰다 보니, 어깨도 닿고, 나중에는 손도 서로 잡게 되고, 그녀의 가방도 들어주게 되었습니다. 도시락 통이 두개나 들어 있는 가방이었지만 저에게는 하나도 무겁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평소 5분이면 도착하는 집을 뺑뺑 둘러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그녀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에 늦게 집에 들어갔죠. 바다가 보고 싶으면 바다 보러가고, 그녀가 우동이 먹고 싶다면 주머니를 털어 김밥까지 사주었습니다. 그녀가 저에게는 첫사랑이었습니다. 우리의 대화는 끝이 없었습니다. 공부는 왜 해야 하나,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수는 없는 것일까......
Jun 13, 2023•4 min
CBS Radio 음악FM 93.9MHz 매일 18:00~20:00 우리 동네 명호 동호 진호 성호 인호 상호 괄호 중에 내 이름은 괄호 나는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바구니, 세상에서 가장 깊은 바구니를 가지고 있죠 이 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나는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나는 괄호, 가장 커다란 바구니 이 안에 들어오는 것은 이 안에 심기는 것입니다 이 안에 들어오는 것은 나로 인해 자라 잎사귀를 펼치고 열매를 매답니다 나는 괄호 내 이름은 괄호 나는 팔을 벌려 가슴을 넓힙니다 내 안에 들어오고 싶은 세상이 나를 만들었나 봐요 배수연 시인의 <괄호> 누구든 마음엔 괄호라는 마음 주머니가 있어요. 우린 그 속에 무얼 담을지 고민하며 괄호를 넓혔다, 좁혔다, 하며 살아가지요. 아직 여물지 못한 미생의 삶. 여전히 괄호 안엔 물음표가 가득하지만, 그 많은 물음표를 사랑과 느낌표로 바꿔 가며 한 걸음, 한 걸음 완생을 향해 나아가야겠지요. See omnystudio.com/...
Jun 13, 2023•2 min
CBS Radio 음악FM 93.9MHz 매일 18:00~20:00 엄마가 병원에서 퇴원해 뼈에 좋다고 해서 사골을 끓였습니다. 친정집에 있는 커다란 압력솥에다..이런 건 은근히 오랫동안 끓여야 하는데 큰 압력솥에 사골을 넣고 잡 내를 없애기 위해 한번 끓여내고 속전속결로 사골과 소고기를 넣어 또 한 번 압력솥에 끓였습니다. 그렇게 한 시간 가량 끓인 후 첫물을 따로 담아두고 다시 두 번째를 끓였습니다. 한참을 끓이다가 불을 낮추어 은근하게 끓였습니다. 엄마는 명절이 되어 친척들이 많이 모이면 큰 소머리를 사서 사랑방 가마솥에 넣고 장작불로 끓이셨습니다. 그렇게 뜨끈한 국물에 찬밥을 말아서 김치 하나로 만찬이 되는 국밥을 엄마는 좋아하셨습니다. 그런데 나는 너무나 졸속으로 그 진한 국물을 내려했습니다. 빨리 해 놓고 집에 가서 아이들 밥을 챙겨줘야 한다는 생각에 김이 빠지길 기다리지 못하고 딸각 거리는 추를 강제로 열어 젖혀 김을 빼기 시작했고 압력솥에서 펄펄 끓었던 것이라 쉽게 김...
Jun 12, 2023•4 min
CBS Radio 음악FM 93.9MHz 매일 18:00~20:00 죽을병 걸려 반년 병원에 엎드려 있다가 구사일생으로 풀려나온 날 사람들은 나를 만날 때마다 살아줘서 고맙습니다 인사를 했다 왜 내가, 살려줘서 고맙습니다 그렇게 인사해야지 저쪽에서 거꾸로 살아줘서 고맙습니다 인사하는 걸까? 그때는 그것이 궁금했었다 지나면서 생각해보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일이구나 싶었다 같이 밥 먹어줘서 고맙습니다 사랑해줘서 고맙습니다 당신이 세상에 있어줘서 고맙습니다 내 옆에 있어줘서 고맙습니다 이 얼마나 좋은 세상인가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가 이 얼마나 눈물겨운 세상인가 이런 세상 깨우쳐주셔서 감사합니다. 나태주 시인의 <살아줘서 고맙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낯선 이의 친절에, 훈훈한 사는 이야기에, 병마를 이겨낸 사람을 봐도, 소소한 일상에도 뭉클해집니다. 모두 내 일처럼 그저 고맙다, 또 고맙다, 하게 되지요. 그렇게 고마운 일이 많아지니 매 순간이 보석처럼 빛이 납니다. ...
Jun 12, 2023•2 min
CBS Radio 음악FM 93.9MHz 매일 18:00~20:00 저는 남자와 여자 쌍둥이를 키우는 고2 맘입니다. 아이들이 남녀공학을 다니는 관계로 같은 학교에 배정 받았습니다. 근데 얼마 전 아이한테서 들은 한 선생님의 말이 인상 깊게 남아있습니다. 윤리를 가르치는 선생님인데 우리 딸아이가 있는 여자학급에 들어가서 ‘여러분은 결혼을 하지 마십시오. 여자는 결혼을 해서 딱히 얻는 이익이 별로 없습니다. 결혼을 하는 순간 남편 뒷바라지에 아이출산에 육아에..직장을 다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애는 누구한테 맡겨야 하나 눈치를 봐야 합니다. 그리고 직장에서 돌아오면 저녁식사 청소 빨래 등등 힘이 두 배로 듭니다. 그러면 대학 다니며 어렵게 들어간 직장 포기하고 주부가 되는 길을 선택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남편의 월급에 의존해야 하고 남편의 눈치를 봐야하고... 제가 남자지만 여자가 그런 수고스러움을 감수하면서 까지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 들어가야 할 필요가 있을까 생각이 ...
Jun 11, 2023•4 min
CBS Radio 음악FM 93.9MHz 매일 18:00~20:00 쪼글쪼글 말라붙은 꽃잎차 뜨거운 물 부으니 쭉 쭉 쭉 구겨졌던 속 다 드러낸다 꽃술도 꽃잎도 색깔도 기지개 켜듯이 샅샅이 친구야, 너는 무엇을 부었을 때 동백꽃보다 더 활짝 피어날 것 같니? 나는, 네가 내게 쏟아질 때 벌레 먹은 속내까지 속속들이 다 펴지는데 울음도 웃음도 몽땅 터지는데 권애숙 시인의 <꽃차 같은 친구> 친구들과 만나 징하게 수다를 떨 때가 있어요. 꽃차의 꽃이 피듯 시든 마음 꽃이 다시 필 때까지 말예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다 보면 어느덧 헤어질 시간. 그중 수다쟁이 친구가 아차 싶어 말합니다. “미안 내 얘기만 했네~ 너흰 어때? 다음엔 입 꾹~” 입술에 지퍼 채우는 시늉을 하는 친구의 행동에 모두 ‘하하하’ 목젖을 보이며 한바탕 크게 웃습니다. 그렇게 모두의 마음에 꽃잎이 활짝 피어나면, 집으로 가는 내내 다시 긴 수다가 이어지곤 하지요. See omnystudio.com/li...
Jun 11, 2023•2 min
CBS Radio 음악FM 93.9MHz 매일 18:00~20:00 뭐 먹고 싶어? 그런 물음을 들을 때 나는 남편이 물으면 '당신 먹고 싶은 거.' 아이들이 물으면 ‘너희들 먹고 싶은 거.' 그래도 꼬치꼬치 물어보면 그저 '아무거나' 였습니다. '내가 한 밥 말고 남이 한 밥이면 다~~맛있어.' 라고.. 그러다가 작년 이맘때쯤 지인이 밴댕이가 제철이라며 강화도에 밴댕이 먹으러 가자고 했습니다. 강화 풍물시장에서 밴댕이 정식을 먹는데....밴댕이 회, 무침, 구이로 푸짐히 한 상이 차려졌습니다. 회나 무침도 싱싱하지만 회 종류는 그리 좋아하진 않아서 기름에 튀긴 듯한 밴댕이가 고소하고 맛있었습니다. 남기고 오기 아깝기도 했지만 고소함이 좋아서 일곱, 여덟 마리 쯤 제가 혼자 다 먹었나 봅니다. 그 이후로 시누이는 "영옥이가 무언가를 그렇게 맛있게 잘 먹는 거는 처음 봤네!" 라고 하고 신랑도 그렇게도 맛있었냐고? 엄청 맛있게! 먹었다고!^^내가 그랬나? 그러고 생각해 보니 가장 큰 ...
Jun 11, 2023•4 min
CBS Radio 음악FM 93.9MHz 매일 18:00~20:00 See omnystudio.com/listener for privacy information.
Jun 11, 2023•4 min
CBS Radio 음악FM 93.9MHz 매일 18:00~20:00 57번 버스 타고 집에 오는 길 여섯살쯤 됐을까 계집아이 앞세우고 두어살 더 먹었을 머스마 하나이 차에 타는데 꼬무락꼬무락 주머니 뒤져 버스표 두 장 내고 동생 손 끌어다 의자 등을 쥐어주고 저는 건드렁 손잡이에 겨우겨우 매달린다 빈자리 하나 나니 동생 데려다 앉히고 작은 것은 안으로 바짝 당겨앉으며 ‘오빠 여기 앉아’ 비운 자리 주먹으로 탕탕 때린다 ‘됐어’ 오래비자리는 짐짓 퉁생이를 놓고 차가 급히 설 때마다 걱정스레 동생을 바라보는데 계집애는 앞 등받이 두 손으로 꼭 잡고 ‘나 잘하지’ 하는 얼굴로 오래비 올려다본다 안 보는 척 보고 있자니 하, 그 모양이 이뻐 어린 자식 버리고 간 채아무개 추도식에 가 술한테만 화풀이하고 돌아오는 길 내내 멀쩡하던 눈에 그것들 보니 눈물 핑 돈다 김사인 시인의 <오누이> 동생들 공부시키려고 누이는 공장으로 향하고, 부모님 고생 덜어드리려 맏형이 타지로 떠나던 시절,...
Jun 11, 2023•3 min
CBS Radio 음악FM 93.9MHz 매일 18:00~20:00 요즘 제 아내는 중고거래에 푹 빠져 있습니다. 하루는 퇴근길에 중고거래를 하기 위해 외출한다는 아내, "이제 우리는 우유병 소독기는 필요 없잖아? 출산한 분이 필요하다고 해서." "날도 어둡고 내가 다녀올게. 얼마 받으면 돼?" "6만 5천원. 절반 넘게 깎아 준 거니까 절대 네고 해 주지 말고." 약속 장소에 도착하니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가 미혼모라 새 것 살 형편은 안 되어서요." 혼자서 아기를 키운다는 얘기에 "아 네..그냥 5만원만 주세요." "어머 감사합니다. 저 진짜 아기 잘 키울게요." 그러고 귀가를 했고, 아내에겐 살짝 잔소리를 들었지만 마음은 뿌듯했습니다. 그런 몇 시간 후, 아내가 불편한 표정으로 제게 폰 화면을 보여줍니다. "참..어이가 없어서..이거 우리가 방금 판 우유병 소독기 맞지?" "이게 왜..중고거래에 다시 올라 왔지?" "아까 그 사람..미혼모라 하...
Jun 11, 2023•4 min
CBS Radio 음악FM 93.9MHz 매일 18:00~20:00 봄이 되면 밭가에 사과나무를 두 주 심었으면 좋겠구나 그러세요, 제가 산림조합 나무 시장서 조생종으로 사다 드릴게요 그만두자, 옆 밭에 그늘지면 농사 안 된다 아니요 그냥 심으세요, 농사가 안 되면 얼마나 안 될라고 그만두자, 내가 그 사과를 먹을 날까지 살겠냐 아니요, 요즘 사과나무는 심으면 이태부터 달려요 그냥 심으세요 녹내장 수술을 한 어머니 눈에 불빛이 잠깐 어린다 김남극 시인의 <늦은 소원> 내가 살면 얼마나 산다고... 그 말에 몇 번이나 가슴이 무너졌던지. 듣는 자식 맘 아프게 왜 저런 헛헛한 말을 말끝마다 붙이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요. 하지만 그 말은 결국 부모님의 유언이 되었습니다. 그래, 하고픈 게 있으면 다 하고 가자. 뒤늦은 소원으로 남겨둬 자식 가슴에 못 박지 말자 다짐했건만, 나이가 들면 들수록 내가 살면 얼마나 더 산다고...하던 그 말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며 집을 짓습니다. ...
Jun 08, 2023•3 min
CBS Radio 음악FM 93.9MHz 매일 18:00~20:00 한쪽 손은 지팡이 한쪽 손은 휘어진 허리위에 얻고 조심조심 한걸음 두 걸음 발걸음을 옮깁니다. 지팡이에 힘을 너무 많이 싫은 듯 지팡이가 후둘 후둘 떨리고 발 길이의 2분의1 이상 넓히지 못하고 걷습니다. 지나가는 차 오토바이 자전거 킥보드까지 ....수많은 바퀴들이 굴려가지만 모두들 느림보 할아버지를 잘도 피해갑니다. 소방도로이고 한적한 곳이지만 할아버지가 인도를 걷지 않고 차도로 걷는 것은 아마도 울퉁불퉁한 보도 불럭에 넘어질세라 평평한 도로로 걷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할아버진 20년 전만 해도 너무 멋쟁이 아저씨였습니다. 키 크고 잘생기시고 옷 잘 입으셔서 지나가면 유난히 돋보이는 분이셨지요. 저와는 인연이 없어 말 한마디 눈길한번 마주치지 않아서 뭐하시는 분인지 연세는 몇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멋쟁이시고 잘생기고 하셨던 분이 머리카락이 적어지고 어깨도 휘어지고 걸음걸이가 느려지더니 어느 날 백...
Jun 08, 2023•4 min
CBS Radio 음악FM 93.9MHz 매일 18:00~20:00 나무는 추운 날 얼음판의 팽이가 되고 꿈을 키우는 책상이 되고 사각사각, 파를 써는 도마가 되고 성적표에 꾹 찍어 주는 도장이 되고, 나무는 강을 건너는 다리가 되고 집을 짓는 서까래가 되고 기둥이 되고 참외밭의 참외를 지키는 원두막이 된다. 때로는 일기장의 종이가 되고 세상을 내려다보는 창틀이 된다. 나무는 오랜 세월을 홀로 서서 사는 동안 저보다 남을 위해 쓰여질 일을 더 많이 생각한다. 권영상 시인의 <강을 건너는 다리가 되고> 비 내리듯 눈물이 쏟아지는 날엔 우산이 되어주고 불어난 강물처럼 근심이 많을 땐 다리가 되어주고 좋은 일이 있을 땐 불꽃 같은 박수를 보내고 아낌없이 주고도 환하게 웃어 보이는 사람. 누군가에게 무엇이 될까 고민하는 아름다운 나무 같은 사람이 되었으면, 참으로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See omnystudio.com/listener for privacy information....
Jun 07, 2023•2 min
CBS Radio 음악FM 93.9MHz 매일 18:00~20:00 딸이 전화를 했습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망설이는 게 전화기 너머로 느껴집니다. 무슨 일이 있냐 했더니 아무 일 없고 갱년기라서 그렇다고 합니다. 엄마가 보고 싶다고.. ‘언제든 오면 되지 뭘 망설이냐?’ 했더니 ‘엄마는 아빠가 힘들게 할 때 어떻게 견뎌냈냐’ 고 묻습니다. 오래전 딸이 어릴 때 집에 걱정이 있었습니다. 아이들 모르게 처리한다고 했는데 딸이 말은 안 해도 알고 있었나 봅니다. 딸에게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말은 하지 않고 혼자 삭이려합니다. 나도 그랬었습니다. 그때는 그게 맞는 줄 알았죠. 그렇게 하느라 혼자 많이 힘들었습니다. 딸도 지금 그런가봅니다. 둘은 아무 말 없이 수화기를 붙잡고 있었습니다. 엄마가 옛날에 해주던 수제비가 먹고 싶은데 아무리 수제비 맛 집을 찾아 다녀도 그 맛이 안 난다고 그걸 먹으면 힘이 날거 같다고 합니다. 그거 못해줄까 얼른 오라 했더니 아픈 엄마에...
Jun 07, 2023•4 min
CBS Radio 음악FM 93.9MHz 매일 18:00~20:00 어릴 때, 두 손으로 받들고 싶도록 반가운 말은 저녁 무렵 아버지가 고기 두어 근 끊어왔다는 말 정육점에서 돈 주고 사온 것이지마는 칼을 잡고 손수 베어온 것도 아니고 잘라온 것도 아닌데 신문지에 둘둘 말린 그것을 어머니 앞에 툭 던지듯이 내려놓으며 한마디, 고기 좀 끊어왔다는 말 가장으로서의 자랑도 아니고 허세도 아니고 애정이나 연민 따위 더더구나 아니고 다만 반갑고 고독하고 왠지 시원시원한 어떤 결단 같아서 좋았던, 그 말 남의 집에 세들어 살면서 이웃에 고기 볶는 냄새 퍼져나가 좋을 거 없다, 어머니는 연탄불에 고기를 뒤적이며 말했지 그래서 냄새가 새어나가지 않게 방문을 꼭꼭 닫고 볶은 돼지고기를 씹으며 입 안에 기름 한입 고이던 밤 안도현 시인의 <돼지고기 두어 근 끊어왔다는 말> 퇴근하는 아버지가 고기 좀 끊어왔다 그러면 안방엔 어린 동생들의 재롱잔치가 벌어졌고 새침한 사춘기 누이도 슬며시 문지방...
Jun 06, 2023•2 min
CBS Radio 음악FM 93.9MHz 매일 18:00~20:00 이사하고 낯선 동네에서 맘 붙일 곳이 없어 어느 날엔 동네 도서관에도 가보고 어느 날엔 동네 커피 집에도 가보고, 마트도 가보고 해도 여전히 낯설고 마음이 우울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옷 수선할 일이 있어 집근처에서 수선 집을 찾던 중 건물 한 귀퉁이에 자리한 수선 집을 발견하고 옷을 맡겼는데 사장님 솜씨가 너무 좋아 한 두 번 갈 때마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수선집 사장님과 친해졌습니다. 직장을 다닐 때는 바쁘고 사치를 부릴 여유가 없다는 이유로 제가 하고 싶은 취미 하나 갖지 못하고 살다가 이제는 직장을 그만두고 남편 따라 멀리 이사 온 뒤로는 이제라도 취미를 찾아볼까 했던 차에 옷 수선집 사장님의 뛰어난 솜씨에 반해 바느질을 배워볼 까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사장님에게 했더니 흔쾌히 자신이 도울 수 있거나 가르쳐 줄 수 있는 건 가르쳐 주겠다고 해서 요즘엔 재봉틀로 바느질을 배우고 있습니다....
Jun 06, 2023•3 min
CBS Radio 음악FM 93.9MHz 매일 18:00~20:00 어머니는 2남 4녀 중 맏딸인데 어린 시절 동생들을 대신해 집안일을 도맡아 하면서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그 시절, 농촌의 없는 살림에 동생들마저 공부시킬 수 없다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동생들에게 객지에 가서 까지 공부하라고 엄마가 등 떠밀어서 공부시켰다고 합니다. 훗날 이모들은 무사히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가정을 꾸려서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살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젊은 시절 아버지와 사별 후 우리 삼 남매 키우느라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이모들은 어린 시절 어머니에 대한 보답으로, 물심양면으로 우리에게 보탬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철마다 옷이며, 먹을거리를 보내주었고, 제가 고등학교를 읍내로 가게 되었을 때는 이모 집에서 살 수 있게 방 한 칸 내어 주어 고등학교 3년을 이모 집에서 다닐 수 있었습니다. 30년 전 시골집을 정리하고 읍내에 우리 집을 사게 되었을 때 이모...
Jun 05, 2023•4 min
CBS Radio 음악FM 93.9MHz 매일 18:00~20:00 햇빛이 ‘바리움’처럼 쏟아지는 한낮, 한 여자가 빨래를 널고 있다, 그 여자는 위험스레 지붕 끝을 걷고 있다, 런닝 셔츠를 탁탁 털어 허공에 쓰윽 문대기도 한다, 여기서 보니 허공과 그 여자는 무척 가까워 보인다, 그 여자의 일생이 달려와 거기 담요 옆에 펄럭인다, 그 여자가 웃는다, 그 여자의 웃음이 허공을 건너 햇빛을 건너 빨래통에 담겨 있는 우리의 살에 스며든다, 어물거리는 바람, 어물거리는 구름들, 그 여자는 이제 아기 원피스를 넌다. 무용수처럼 발끝을 곧추세워 서서 허공에 탁탁 털어 빨랫줄에 건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그 여자의 무용은 끝났다. 그 여자는 뛰어간다. 구름을 들고. 강은교 시인의 <빨래 너는 여자> 빨래는 삶의 희망을 만드는 연금술일지도 몰라요. 찌든 일상의 얼룩을 말끔히 지워내고 바람 한 줄기, 구름 한 줌을 담아내면 언제 그랬냐는 듯 기분이 좋아지니까요. 오늘도 ...
Jun 05, 2023•2 min
CBS Radio 음악FM 93.9MHz 매일 18:00~20:00 언제부터인가 내 이름이 사라졌습니다. 엄마, 어~~이, 누구누구 엄마, 언니...형님...유일하게, 가끔 한 번씩 몸이 안 좋을 때 가는 병원이나 은행에서나 제 이름을 불러줍니다. 그래서 예쁜 첫딸 낳았다고 좋아하셨던 아버지가 지어 주신 내 이름을 찾기로 했습니다. 먼저 남편에게 앞으로 나를 부를 때 ‘어~이’ 라고 부르면 대답 안 할 거라고 했더니 갑자기 왜 그러냐는 눈으로 쳐다봅니다. ‘그럼 뭐라고 불러줄까?’ 라며 장난삼아 말을 하는데 나는 웃지도 않고 예쁜 내 이름을 불러달라고 했더니 ‘우리 나이에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래서 ‘없으면 우리가 먼저 하면 되지. 그러니 앞으로 나를 부를 때 성은 빼더라고 이름 불러줘.’ 그렇게 남편에게 말을 하고 친구들과도 카 톡을 하면서 앞으로 우리 서로 이름을 불러보는 것이 어떠냐고 했더니 좋다는 사람과, 이름이 너무 흔해서 길에서 부르면 서너 명은 뒤 돌아...
Jun 04, 2023•4 min
CBS Radio 음악FM 93.9MHz 매일 18:00~20:00 See omnystudio.com/listener for privacy information.
Jun 04, 2023•3 min
CBS Radio 음악FM 93.9MHz 매일 18:00~20:00 해 질 무렵이면 무거운 것이 가볍다 가벼운 것이 무겁다 해 질 무렵이면 배가 고파도 배부르다 배가 불러도 배고프다 해 질 무렵이면 보고 싶어도 보고 싶지 않다 보고 싶지 않아도 보고 싶다 해 질 무렵이면 좁은 골목길에 텅 빈 물지게를 지고 걸어가는 사람이 아름답다 무거울 때는 가볍게 가벼울 때는 무겁게 흔들리다가 엎어져 텅 빈 물통의 물을 다 쏟아버린 사람이 아름답다 정호승 시인의 <해 질 무렵> 마음의 중심이 잘 잡히지 않을 땐 아무것도 두지 않는 게 답일지도 몰라요. 힘겨웠던 하루도, 마음을 괴롭히는 일들도 붉은 노을에 무심히 툭 던져 버려요. 그렇게 다 쏟아내고 가볍게, 가볍게, 다시 내일을 사는 거예요. See omnystudio.com/listener for privacy information....
Jun 04, 2023•2 min
CBS Radio 음악FM 93.9MHz 매일 18:00~20:00 나는 늘 사진기를 들고 다닌다 보이는 것은 모두 찍어 내가 보기를 바라는 것도 찍히고 바라지 않는 것도 찍힌다 현상해보면 늘 바라던 것만이 나와 있어 나는 안심한다 바라지 않던 것이 보인 것은 환시였다고 나는 너무 오랫동안 알지 못했다 내 사진기는 내가 바라는 것만을 찍어주는 고장난 사진기였음을 한동안 당황하고 주저하지만 그래도 그 사진기를 나는 버리지 못하고 들고 다닌다 고장난 사진기여서 오히려 안심하면서 신경림 시인의 <고장난 사진기> 어떤 사람의 폰 앨범에는 꽃이 가득하고, 어떤 사람은 풍경이, 음식들이 가득합니다. 또 가장 예쁘게 나온 내 사진들이 있지요. 친구들은 서로의 사진들을 보면서 너는 어쩜 이러냐, 네 폰 고장 났다며 놀려대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만 쏙쏙 골라 찍고 그 누구보다 나를 가장 돋보이게 찍어주는 고장 난 내 폰의 사진기가 제일로 좋습니다. 그 사진들을 보면 웃음이 절로 나니까, ...
Jun 04, 2023•2 min
CBS Radio 음악FM 93.9MHz 매일 18:00~20:00 올해 고등학생이 된 사춘기 우리 딸. 묻는 말에 대답도 잘 안 하고 늘 방문을 콕 닫고 들어가, 은근한 신경전을 벌이는 날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때마다 "네가 사춘기면 엄마는 갱년기야. 갱년기가 사춘기 이긴다는데 엄마는 도저히 너를 못 이기겠다. 정말 넌 왜 이렇게 까칠한 거니?" 하면 딸아이는 한마디도 지지 않고 "외할머니가 그러시던데 엄마는 중학교 때부터 그랬다면서. 엄마 닮아서 그런가보네." 제 속을 긁어댑니다. 고등학생이 되어 몸도, 마음도 피곤할 것 같아 웬만하면 건드리지 않으려는데 얼마 전 아침밥을 먹으며 "학교생활은 재미있니? 친구들 많이 사귀었어?" 라고 조심스럽게 물으니 "엄마는 학교 다닐 때 재미있었어? 선생님들은 맨 날 공부해라, 지금 열심히 안하면 3학년 되서 후회한다고 무슨 녹음기 틀어놓은 것처럼 공부 이야기만 하고, 재미없어." 괜히 말을 걸었구나 싶으면서 딸아이의 대답을 듣고 나니 또...
Jun 04, 2023•3 min
CBS Radio 음악FM 93.9MHz 매일 18:00~20:00 이모가 유명 브랜드 다리미를 샀는데 3개월 쓰고 고장이 났다고 합니다. 다리미에서 스팀이 힘 있게 뿜어져 나오지 않고, 물 세듯이 힘없이 줄줄 흐른다고.. AS 맡기려고 하다 귀찮아서 그냥 쓴다고 합니다. 저는 집에 와서 저희 집 다리미를 봤습니다. 이 다리미는 1983년도에 아빠가 해외 건설노동자로 일하면서 사온 다리미입니다. 얼마나 튼튼한지 그 동안 한 번도 고장 난적이 없습니다. 낡고 색은 좀 변했지만, 이 다리미로 교복, 군복, 일상복, 정장 까지 칼 주름 잡았지요. 또 누나는 에코 백을 많이 만드는데, 이 다리미로 반듯하게 각 잡듯이 다려서 팔기도 했습니다. 며칠 전 친구 병문안 가는 길에 붕어빵을 사가기로 했습니다. 붕어빵 파는 곳에 가서 기다리는데 옆에 밥통이 있는 겁니다. '밥통에서 반죽을 숙성 시키나?'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밥통에 돈을 넣어 두네요. 붕어빵을 사면 손님들이 알아서 밥통에 돈을 넣고,...
Jun 04, 2023•4 min
CBS Radio 음악FM 93.9MHz 매일 18:00~20:00 그 유명한 슈퍼 호박을 심었더니 금 새 튼실한 놈들이 나옵니다. ''역시 초보 농사꾼이 처음은 잘 짓는단 말이야.'' 위 밭에 농사짓는 언니 말씀입니다. 2주 만에 올라가 보니 입을 닫을 수 없을 정도로 호박이란 놈이 커 가고 있었습니다. 여기도 저기도 신기하게 발견한 것 만해도 6개나.. 이 많은 걸 누굴 줄까 생각하다 혼자 코웃음을 치고 말았습니다. 8년 전부터 건강을 위해 시작한 탁구 친구들이 생각났습니다. 다음 시합 때 우승한 순서대로 큰 호박부터 1.2.3.등 시상품으로 걸기로 했습니다. 드디어 수확한 거대한 호박. 그런데 탁구 시합 때 주려니 상품보존을 잘 하였다 갖고 가야 할 텐데 이걸 어찌 가져가야 할지.. 남편은 보자기에 싸 가면 좋을 듯 하다하여 보자기에 쌌습니다. 어깨에 메고 내려가는데 산행하러 올라오는 사람 ‘뭐야’ 하면서 자기들 끼리 웃습니다. 결국 집에까지 잘 매고 왔는데 또 탁구장까지 가져...
Jun 01, 2023•4 min
CBS Radio 음악FM 93.9MHz 매일 18:00~20:00 은어가 익는 철이었을 것이다. 아니다. 수박이 익는 철이었다. 통통하게 알을 밴 섬진강 은어들이 더운 몸을 더이상은 참을 수가 없어 찬 물을 찾아 상류로 상류로 은빛 등을 파닥이며 거슬러 오를 때였다. 그러면 거기 간전면 동방천 아이들이나 마산면 냉천리 아이들은 메기 입을 한 채 바께쓰를 들고 여울에 걸터앉아 한나절이면 수백마리의 알 밴 은어들을 생으로 훑어가곤 하였으니, 지금와 생각해보면 참으로 끔찍한 일이지만, 그런 밤이면 더운 우리 온몸에서도 마구 수박내가 나고 우리도 하늘의 어딘가를 향해 은하수처럼 끝없이 하얗게 거슬러 오르는 꿈을 꾸었다. 이시영 시인의 <여름>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다 물을 만나면 첨벙첨벙 물고기도 잡고 살구도 따 먹고 여름은 신나는 일만 가득 담은 선물 보따리였죠. 한 손엔 옥수수 다른 한 손엔 수박을 들고 쏟아지는 별 속에서 내일을 꿈꾸던 그 여름이 유월을 따라 저만치서 오고 ...
Jun 01, 2023•3 min